디지몬 서바이브
PS4/Switch/Steam,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2022년 7월
* (주의) 이 글은 게임 『디지몬 서바이브』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2017년 12월 『디지몬 스토리 사이버 슬루스 해커스 메모리』 이후 약 4년 반만의 디지몬 게임 신작. 원래 2019년 발매 예정이었던 것이, 여러 사정으로 인해 연기가 거듭되면서 원래 예정보다 몇 년이나 지난 올해에야 발매되었다. 장르는 택틱스 배틀을 곁들인 사실상의 비주얼 노벨.
큰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1999년 작, 이후 『어드벤처』)의 도입부와 비슷하게 8명의 소년소녀가 캠프 중에 디지몬이 사는 이세계로 빨려들면서 생기는 일을 그린다. 크게 다른 점이라면 애니메이션에서는 전원이 모두 무사히 귀환하는 데 성공하나, 여기서는 일부 캐릭터가 죽음을 맞이하며 탈락한다는 점이 있겠다. 비주얼 노벨인 만큼 스토리상 분기가 있고, 히든 루트까지 총 4개의 결말이 있는데, 각각의 결말에서 살아남는 캐릭터가 조금씩 다르다.
도입부만 비슷한 것은 아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지역이나 적 캐릭터에도 『어드벤처』의 오마주가 넘치며, 무엇보다 근간에 있는 설정-'디지몬'이 실제로 디지털 생명체가 아니라 과거부터 현실 세계와 겹쳐진 다른 세계에 살던 존재들이었고, 현대에 이르러 그 세계와 존재들이 디지털 기기를 통해 가시화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가져와 베이스로 삼았다. 그러한 배경 설정 덕에 이 작품에는 '디지몬'이라는 용어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애초에 저 이세계에 사는 주민들은 '디지털'도 아니며, '몬스터'도 아니기 때문이다.
SF인 것도 아니다. 이 작품에는 의도적일 정도로 SF적 색채가 지워져 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설화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와 오컬트 사이 어드메에 있는 이야기다. (디지몬 게임 발매 주기가 원체 긴 탓에 '디지몬 게임'을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조금 의외로 느껴질, 또는 실망스러운 지점일수도 있으나, 제작진이 이 게임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함을 공언한 채로 만들어진 작품이므로 그 부분은 감안하고 감상할 필요가 있겠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저 이세계의 주민들에게 '디지몬'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SF 영역으로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그런 점에서는 다른 디지몬 게임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이 작품을 해석해도 괜찮을 듯 하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결말은 (이름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이세계와 인간 세계가 강제로 합쳐지면서 혼돈에 빠지는 디스토피아적 결말이었다. 두 세계의 융합은 몇몇 다른 루트의 결말에서도 그리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그려졌던 다른 결말들과 달리 이 경우가 조금 더 설득력 있는 미래라고 느껴졌다. 배드엔딩이 아니라 오히려 이 캐릭터들의 그 이후를 기대하게 만드는 프롤로그적 에필로그여서 기억에 남았다.
아쉬운 점 역시 없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주얼 노벨이다 보니 텍스트 위주로 게임이 진행되는데, 몇몇 구간에서 별 의미 없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대사가 있어 이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러 결말을 보기 위해 반복 플레이를 해야 하는 데다, UI 문제인지 한글화 폰트 문제인지 이상하게 화면이 별 내용 없는 모바일 게임처럼 보이기도 해서 단점이 조금 더 두드러져 보였다. 전투 역시 템포가 느리고 생각할 것이 많아 내 취향은 아니었다.
몇 년의 발매 연기를 기다릴 만큼 즐겼느냐고 하면 약간 물음표가 찍히긴 하지만, 팬들에게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견할 지점이 많을 듯한 게임이었다. 『어드벤처』의 요소는 가득하지만,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이야기였다. 『어드벤처』의 후속작으로 칭할 수 있는 작품들은 많이 만들어졌지만, 사실상 이 작품을 어른이 된 팬들을 위한 정신적 후속작이라고 해석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하다. 즐겨 봤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해보기를 권한다.
'호두나무 책장 >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이스티 문학상 작품집 『사건은 식후에 벌어진다』를 읽고 (0) | 2022.10.15 |
---|---|
요네자와 호노부가 쓴 『흑뢰성』을 읽고 (0) | 2022.10.08 |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증언들』을 읽고 (0) | 2022.09.24 |
영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들려줘』 감상 (0) | 2022.09.17 |
웹소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감상 (0) | 2022.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