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26

테이스티 문학상 작품집 『사건은 식후에 벌어진다』를 읽고

사건은 식후에 벌어진다 김노랑, 김태민, 한켠, 박하루, 범유진, 유사본, 전효원 지음, 황금가지, 2021년 8월 이 이야기는 경기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 보고서라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 전에 자칭 한국의 유일한 강력 사건 전담 탐정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덜떨어진 대식가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 「탐정에게는 후식이 있어야 한다」 중에서 황금가지에서 진행하는 소규모 문학상인 '테이스트 문학상' 3, 4회 수상작 작품집. 전체적으로 디저트류(특히 커피)의 비중이 높은 것이 신기하다 싶었는데, 찾아보니 3회 주제가 '디저트'였고, 4회 주제가 '커피와 차'였더라. 내 취향에 조금 더 맞는 건 당선작보다는 우수작들이었다. 먼저 「탐정에게는 후식이 있어야 한다」..

요네자와 호노부가 쓴 『흑뢰성』을 읽고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리드비, 2022년 9월 고전부 시리즈 등으로 알려진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간. 중세 일본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물이다. 적군에 둘러싸인 채 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며 농성하는 성에서 기묘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살려둬야 할 인질이 밀실에서 죽고, 베어 온 적군의 머리가 표정을 바꾸고. 범인도 수법도 묘연한데, 이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불길한 소문이 퍼지고 사기가 떨어져 성이 무너질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성주가 고민과 조사를 거듭하며 사건을 해결해가는 이야기다. 중세 일본 배경이라 따라갈 수 있을까? 하고 조금 걱정했는데 읽다 보니 중세 유럽 배경인 소설 읽을 때의 거리감이랑 비슷하고, 본질적으로 안락의자 탐정소설인지라 생각보다 큰 문제 없이 읽었다(성주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증언들』을 읽고

증언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황금가지, 2020년 1월 미지의 독자여. 지금 당신이 읽고 있다면 이 원고는 적어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미망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게는 영영 독자가 없을지 모른다. 아마도 나는 벽에 대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 본문 중에서 좋았던 소설의 후속작은 대개 그다지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특히 오랜 세월을 거친 뒤에 나오는 후속작은 더더욱 그렇다. 전작에서 의도적으로 남겨뒀던 공백을 굳이 채워서 맛을 떨어뜨리거나, 아예 다른 곳을 향하거나, 시대에 따라오지 못하거나. 하지만 여기에 예외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 있다. 『시녀 이야기』(1985)의 30여년 만의 후속작, 『증언들』이다. 어느날 평범한 일상..

웹소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감상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백덕수 지음, KWBOOKS, 2021년 1월~ (카카오페이지 연재중, 2022년 9월 현재) 카카오페이지 쿠폰을 털려고 둘러보다가 예전부터 이름만은 열심히 들어왔던 '데못죽'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조금 있으니 잠을 줄이고 밥 먹는 시간을 잊어가며 말 그대로 모든 여유시간에 이걸 읽고 있는 내가 있었다. 웹소설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긴 하지만, 한 편 한 편 돈 내가며 본 웹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그 전까지는 전자책 단행본으로 엮여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보거나, 아예 종이책을 읽거나). 그렇게 근 1주일만에 500화 가까이 있는 연재분을 따라잡았다. 비현실적인데 동시에 초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스탯이 어쩌고 하는 현대 판타지 장르 웹소설 특유의 흐름은 당연하게도 현실에 ..

『다섯 번째 감각』 감상

다섯 번째 감각 김보영 지음, 아작, 2022년 2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조용히 숨을 끌어당겼다. 「연주 씨가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머리 양쪽에 대고 입을 크게 벌렸다. (「다섯 번째 감각」 중에서) 김보영 작가의 초기 단편 10편을 수록한 소설집이다. 아, 역시 김보영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정판이긴 하지만 10년 이상 전의 단편들인데, 지금 읽어도 '올해의 단편'급 되는 이야기들이 그냥 툭툭 나온다. 앞 다섯 편의 작품들은 반전의 이야기라고 할까? 당연해보이는 세계 속에서 언뜻언뜻 위화감이 느껴지다, 이윽고 당연함에 금이 가며 마침내 깨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반전이라고 표현하면 오히려 너무 뻔한 이야기인 것..

『밤의 얼굴들』 감상

밤의 얼굴들 황모과 지음, 허블, 2020년 6월 황모과 작가의 글을 텍스트로 읽는 건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다. 「모멘트 아케이드」로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을 수상한 이후로 계속 지켜본 작가이기는 했고, 참여한 앤솔로지도 꽤 샀는데 이래저래 읽을 책들이 많아 아직까지 손에 들지 못했다. 텍스트가 아닌 매체로는 일전에 에서 영상화된 작가의 작품「증강 콩깍지」로 한 번 접한 적이 있다. 그 때는 내용을 쫓아가기에 약간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더랬다. 내가 영상을 제대로 못 읽은 것이었는지, 작품이 독특했던 건지, 영상이 불친절했던 건지 몰라 마음 한 켠에 두고 있었어서, 이번 책을 읽으면서는 그런 점들을 조금 의식하며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조금 깨달은 건 '원래 이런 분위기의 글을 쓰는 작가였구나..

『저주토끼』 감상

저주토끼 정보라 지음, 아작, 2017년 3월 그는 자신을 묶어달라고 했다. 도구나 묶는 방식, 자세는 그때그때 조금씩 달랐지만, 그는 아주 세세하게 자신의 요구를 설명했다. 나를 묶겠다는 게 아니라 자신을 묶어달라고 했고, 그게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질문 없이 그의 요구에 따랐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그때까지 사람을 묶어본 적이 없었다. 매듭을 묶는 것 자체도 서툴렀다. 그는 참을성 있게 반복해서 설명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꼼꼼하게 묶어주면 고마워했다. (「재회」 중에서) 정보라 작가가 부커상 최종후보에 지목된 것을 계기로 미루고 미뤄두었던 『저주토끼』와 『그녀를 만나다』를 연달아 읽었다. 『저주토끼』라는 작품집이 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어렴풋이 ..

『나와 밍들의 세계』 감상

나와 밍들의 세계 배지훈, 김성일, 남세오, 박하루, 김유정, 연여름, 양진, 천선란 지음, 황금가지, 2021년 10월 나는 이제 찾아 나서려고 한다. 이 세상을 불과 몇 시간 떠나 있었던 아이를, 함께 탐험에 나섰던 친구들이 사라지고 없어 당황하고 있을 아이를. (「초인의 나라」중에서) 황금가지의 웹소설 플랫폼 '브릿G'에 게재된 SF 작품 중에서 여덟 편을 한 권으로 엮은 단편집이다. 도박에 중독된 우주선 조종사, 죽어가는 생명과 다른 생명을 잇는 기계, 아이돌을 응원하고 싶어 인간이 되려는 로봇, 가상 세계으로의 자아의 이동 등등 정말이지 다양한 소재들의 이야기들이 한 권 안에 늘어서 있다. 참으로 배부른 소리인 것은 알지만, 온갖 테마의 앤솔로지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요즘 장르소설계에 발을 붙이고..

『각자의 디데이』 감상

(이미지) 각자의 디데이 오묘 글, 그림, 영컴, 2022년 1월 내가 겨우 쥐어짜낸 말에 겨우 이 정도쯤이야 하고 말하는 너 나의 겨우와 너의 겨우가 이만큼이나 달라도 나는 괜찮아 백 년이 지나도 끄덕없는 추억이 생겨서 비록 기대한 맑은 하늘 아래 추억은 아니지만 나는 이걸로 무적이야 맨날 꺼내볼 거야 만화를 읽고 감상을 올리는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인상깊게 읽어서 감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랑'과 '파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주변에 떠밀리듯 사귀었다가, 헤어졌지만 그것을 학교 축제가 끝날 때까지 주변에 알리지 않기로 함으로써 벌어지는 며칠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하이틴 로맨스 군상극과 별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나도 웹툰으로 연재되던 초기에 지..

『은하영웅전설』 감상

은하영웅전설 다나카 요시키 지음, 김완 옮김, 이타카, 2011년 10월 대략 7~8년 전에 한 번 정주행을 마친 작품을 의도치 않게 다시 읽게 되었다. 우주 SF를 읽고 싶어져서 처음에는 작년에 영화로도 본 『듄』을 폈더랬다. 실제로 1권을 꽤 읽었었는데, 약간 건조한 이야기에 피로감을 느꼈는지 어쨌는지 『은하영웅전설』의 양과 율리안의 티키타카가 그렇게 생각이 났더랬다. 그래서 『듄』을 잠깐 덮고 오랜만에 '은영전'을 펼쳤고, 정신을 차려 보니 밤을 새워가며 본편 10권을 다 읽어버렸더라는 것이 이번 감상을 쓰기에 이르기까지의 전말이다. (아, 『듄』은 언젠가 다시 읽을 것이다.) 재독이라고는 해도 오래 전이라 8권의 그 역사적인 사건을 빼고는 전후 기억이 흐릿하여 결말도 잘 떠오르지 않았는데, 어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