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무 책장/감상

『지구 끝의 온실』 감상

2021. 10. 27. 00:59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자이언트북스, 2021년 8월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 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
나는 지수 씨가 동의해줘서 기뻤다. 하지만 그가 그다음으로 말한 것은 조금 뜻밖이었다.
"그래도 우린 식물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해."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알려진 김초엽 작가의 첫 장편소설을 읽었다.

'더스트'라는 일종의 아포칼립스가 수습된 이후 시대, 더스트 시대에 번식하던 식물이 이상 증식하는 사건의 원인을 찾으며 그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이 이후 시대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알려 가는 이야기이다.

더스트는 기술에 의해 초래된 재앙이었고 또 기술에 의해 수습되었는데, 그런 면에서 '기술의 양면성'과 같은 테마로 작품을 읽을 수도 있고, 갖다붙이기에 따라서는 '기술의 인문학적 어쩌고' 같은 방향의 해석도 가능하겠다. (어쨌든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든 해결 방법에 기술적 요소가 없지 않기에 반-기술과 같은 방향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SF에서 이런 테마는 너무 오래되었고, 너무 식상하다. 이 작품 역시 그런 논의를 전제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연대'라는 키워드를 꼽아보고 싶다. (당연히 완벽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름 어느 곳보다도 이상적이었던 공동체가 멸망한 뒤, 그곳의 사람들은 예전과 같은 마을을 다시 만들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공동체가 남긴 씨앗을 각자가 새로 잡은 터전에 뿌린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단일한 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아는 공동체가 다시 회복되었으면 하는 마음,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각자가, 이상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서로의 상황을 모르면서도,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향해 나아간다. 이 세계 어딘가에서 그렇게 분투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재앙의 수습도, 전염병의 종식도, 과학의 승리는 맞겠지만 과학'만'의 승리는 아닐 것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토피아 단편선 수록)에서 이 작가를 처음 발견했고, 다 읽고 난 뒤에 어디 다른 세계에 잠시 다녀온 듯한 여운에 한동안 빠져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관내분실」 등을 거쳐 지금까지, 한 작가의 커리어를 처음부터 함께하고 있음이 기쁘다.

 

키워드

#아포칼립스, #공동체, #비동기적_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