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무 책장/감상

『방금 떠나온 세계』 감상

2022. 3. 9. 17:52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한겨레출판, 2021년 10월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숨그림자」중에서)

 

꽤 전에 읽은 책이었는데, 한동안 여러 일로 바빠 이제야 감상을 적는다.

우선 ‘다름’에 대한 감각이 되게 크게 눈에 띈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단어에서 읽히는 우열이 흐려지고 때로는 전복되기까지 한다. 그 경계에서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이해할듯 말듯 한 존재들의 이야기들로 차 있다.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가, 포기했다가, 다시 받아들였다가.

그 외에도 눈에 띄는 건 되게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SF적 소재. 장르 구분만을 생각하면 하드SF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소설집에 비해 조금 더 톤이 확실하고 일관된 느낌이다. 이런 톤의 작품들을 메인으로 엮은, 개인 소설집이자 테마 소설집이기도 한 듯하다.

다 비슷하게 좋아서 특출나게 좋거나 아쉬운 작품을 꼽기 어려웠는데,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굳이 꼽자면 「숨그림자」와 「오래된 협약」 정도가 있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둘 다 우주 소재인데, 우주 스케일로 가면 시간도 거리도 조금 더 과감해지고 관계도 좀 덜 직접적이게 되다보니 생각할 거리도 자연스레 늘어나는 듯하다.

어중간한 비대면 친목이 늘어나 오히려 홀로인 시간이 줄어들기 쉬운 요즘, 또 여러 일들로 어수선한 요즘, 혼자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로 침잠하는 일을 의도적으로라도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흩어져 있던 정신이 자신의 내면으로 모이는 느낌이 참 좋다.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을 받은 독서였다.